아버지는 가끔 옛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일본에 유학가셔서 우찌무라 간조의 사상을 받아드린 이야기, 권투부에 들어가 일본사람들을 때려 눕히려 하셨는데, 도리어 코가 부러지신 이야기, 야구하시면서 홈런치신 이야기, 20대의 아버지는 식민생활을 하는 조선 젊은이가 일본에서 당해야 하는 모진 설움에 대한 이야기들을 쏟아내곤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아름다울 것 같은데, 아버지를 이해하기에 제 나이가 너무 어렸습니다. 1981년 아버지가 환갑을 맞이하실 때 저의 나이가 중학교 2학년이었고 대학을 들어가서 군대를 갈 때 즈음에는 아버지는 이미 70이 넘어가신 후였습니다. 아버지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습니다.
데모하며, 사회적인 반항에 똘똘 뭉친 아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요?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경청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피난 오시면서 이북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내려오신 아버지, 북한에 대한 한을 품으신 아버지를 이해하기 보다는 ‘목사인데 왜 공산당을 용서하지 못하는가’라는 생각으로 아버지와 대립하였었습니다.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던 유일했던 때는 어머니가 미국에 있는 누나를 보러간 6개월 동안 아버지의 식사를 책임질 때였습니다. 당시 술을 마시던 저는 술이 취하면 아버지에게 신앙적 갈등, 사회적 갈등, 가난의 문제들을 술의 힘을 빌어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도 청년시절에 말술을 드셨던 어른이라 그런지, 저의 넋두리를 그냥 받아주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는데 저는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는 아들이 못되었습니다.
큰 아들이 집을 떠나 살기시작한지는 2013년부터이니까 거의 9년이 되었고, 막내는 운전면허를 취득한 이후에는 함께 식사하기도 어렵습니다. 자연스럽게 밥을 같이 먹는 것은 딸아이입니다.
딸 아이에게 미국에 처음 와서 있었던 이야기들부터 해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어떤 순간에 결정을 해야 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 “아빠 왜 그때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질문합니다. 딸 아이의 진지한 눈빛에 어느새 신나서 말하는 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제 말에 경청하며, 과장된 몸짓에 웃음짓는 딸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말씀하실 때 귀찮아하지 않고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한국에 나갔을 때 아버지가 목회하셨던 곳들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가 1950년대 폐허된 곳에서 목회하시면서 찍은 사진을 발견하면 형제들에게 사진을 전송하며 “우리 아버지가 참 멋있었네”라고 이야기 합니다.아버지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는데, 어릴땐 수고하며 애쓰신 반백의 아버지만 기억됩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우리 어른들이 한 살더 먹어갑니다.
말할 시간이 줄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