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 상상할 수 없는 큰 트럭이 저희교회에 들어왔습니다.
48톤 트럭!
그리고 그 안에 가득 들어 있는 음식박스! 그것도 우리가 수고할 필요없 이 종류별로 들어가 있는 박스들....
트럭을 보면서 천사가 온 듯 봉사하러 온 분들이 모두 기쁨의 탄성을 질 렀습니다. 그리고 10여분이 지난 후 기쁨의 탄성은 비명이 되기 시작했 습니다. 그 트럭은 Lift가 없어 모두 손으로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Lift 가 있는 교회 트럭을 반대로 붙여서 내려 보려고 시도하기도 하고, 밀어 보기도 하고 별별 방법을 다 썼지만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실려 있는 음식박스는 무려 2천여개....
3-4시간에 걸쳐 박스를 모두 내린 후, 투덜거리며 하는 말씀들은 다음주 에는 다시는 안 오겠다고 하시지만, 그 말씀이 농담인 것을 알고 있었습 니다. 그러나 말이 2천개지, 강골인 이동렬 집사님이 몸살이 났다고 할 정도이니 큰 어려움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모두 지쳐버린 얼굴들이지만 그들 중 다음 주에 안 나올 분은 없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교회를 문 닫게 할 때, 종교탄압이라는 말이 있 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만약에 교회만 문을 닫게 했다면 종교탄압이지만 학교도, 비즈니스도 문을 닫았습니다. 감사하게도 문화가 발달해서 교회는 그나마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렸지만 식당을 비 롯한 자영업자들이 받은 타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인생에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너무 힘들었습니다. 교인들 없이 예배드리 는 것도 힘들고, 무기력하게 상황을 바라보는 것은 더 힘들었습니다. 말 씀을 묵상하다가 받은 말씀이 바로 “강도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습 니다.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인가?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리 교 회가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우리는 강도만난 산타아나 사 람들을 돕는 이웃인가? 그 생각을 결정하는 것은 상황의 문제가 아닌 생 각의 문제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생각의 문제입니다. 교회의 어른들은 나이가 드셨기에 봉사 나오시는 것을 말렸습니다. 과연 누가 이 빈자리를 채워야 하나 걱정했는 데,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쉬는 히스패닉 형제들이 달려들기 시작했습니 다.
그들은 일을 잃었다고 낙심하기 보다는 이때 해야 할 일들을 찾아 행하 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낙천적이다 생각하게 됩니다. 전에는 그들은 왜 저렇게 사나, 꿈을 찾아 왔으면 열심히 해서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지 않나, 왜 자녀들이 공부하도록 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요즘 누가 행복한가 보면 그들이 더 행복해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은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때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어떤 일보다 우선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이냐” 묻지 않고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질문하십니다. 참 중요한 관점입니다.
오렌지 가나안장로교회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인 것 참 감사한 일입니다.